일본 버블 경제 붕괴의 모든 것: 광란의 시작, 플라자 합의 영향, 그리고 잃어버린 30년을 향한 아베노믹스 정책

안녕하세요, 투자와 경제에 관심이 많은 여러분.

오늘은 레이 달리오의 ‘경제 작동 원리’를 접한 후 서브프라임 사태와 닷컴 버블에 이어, 일본 버블 경제 붕괴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해보니, 버블을 만드는 배경과 시대적 사건은 달라도 근본 원인은 인간의 욕망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공부하는 입장에서 그 시대를 보면 명백한 버블이지만, 왜 당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까요? 그것 또한 인간의 심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어떤 욕망에 취하게 되면 눈과 귀가 멀어지고 객관적인 판단력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버블 속에서 판단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점검이 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점검은 시대마다 요구하는 기준이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측정하는 객관적인 수치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고 올바른 투자를 하시길 바랍니다.

일본 버블 경제 붕괴의 서막: 전후 재건과 광란의 시대

일본의 경제 부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폐허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수도 도쿄가 초토화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은 패전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당시 미군정은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며 일본 경제는 생필품 부족과 물가 폭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보루로 일본을 선택했고, 이에 따라 일본 경제 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습니다.

특히 한국 전쟁은 일본에 막대한 경제적 특수를 안겨주었습니다. 미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며 군수품 생산과 정비에 일본 기업들이 총동원되었고, 이는 파괴되었던 산업 기반을 재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요타와 미쓰비시 같은 기업들은 전쟁 특수를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약과 미일 안전보장조약 체결은 일본이 국방비 부담을 줄이고 경제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미국이 반도체 기술 이전 및 라이선스를 허용하면서 일본 기업들은 첨단 전자제품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저렴한 엔화 가치와 결합하여 세계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습니다.

1964년 신칸센 개통과 도쿄 올림픽 개최는 일본의 부활을 전 세계에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68년에는 일본이 세계 경제 규모 2위에 오르며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도 ‘메이드 인 재팬’ 제품은 품질 좋고 믿을 수 있는 제품의 대명사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성장은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일본 버블 경제 붕괴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가 됩니다.

일본 버블 경제 붕괴

플라자 합의 영향과 일본 경제 재앙의 시작

1970년대 오일 쇼크는 미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때 일본의 연비 좋은 소형차들이 미국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소니의 휴대용 TV와 워크맨 같은 혁신적인 전자제품들은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며 일본 제품에 대한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미국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어갔고, 대일 무역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1965년부터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는 급격히 증가하여 미국의 경제 패권이 위협받는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습니다.

결국 1985년, 미국은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해 주요 5개국(G5)을 불러 모아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이 합의의 핵심은 달러 가치를 낮추고 엔화 가치를 높여 미국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일본 시장에서 미국 제품의 판매를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압력과 안보 조약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엔화 가치는 급등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플라자 합의 영향은 미국의 기대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이미 미국 소비자들은 일본 제품의 품질과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었고, 엔화 가치 상승만으로는 구매 열풍을 쉽사리 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포기하지 않았고, 2년 뒤인 1987년, 주요 7개국(G7)을 모아 ‘루브르 합의’를 통해 일본에 추가적인 요구를 합니다.

일본 시장을 키워 미국 제품이 더 잘 팔리도록 금리를 낮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금리를 파격적으로 인하했고, 시중에 막대한 자금이 풀리게 됩니다.

이 저금리와 초호황기는 일본인들의 눈을 기술 발전이 아닌 부동산과 주식 시장으로 돌리게 했습니다.

은행들은 투기를 부추기며 LTV(주택담보대출비율) 120%까지 대출을 해주거나, 심지어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통해 또 다른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은행 간의 금리 인하 경쟁까지 벌어지며 돈을 빌리는 것은 너무나 쉬워졌습니다.

도쿄의 땅값은 6년 만에 3배 이상 폭등했고, 긴자의 한 빌딩은 평당 약 12억 원을 호가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자국 부동산을 넘어 하와이의 호텔과 뉴욕의 상징적인 건물들까지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식 시장 역시 폭등했습니다. 1980년 6천 엔이던 닛케이 지수는 1989년 말 3만 8천 엔 선까지 오르며 9년 만에 6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1989년에는 일본 주식 시장의 시가총액 합계가 뉴욕 증권거래소를 넘어 세계 1위에 등극했습니다. 당시 세계 시가총액 20위권 기업 중 14개가 일본 기업이었고, 그중 절반이 은행 및 금융업이었습니다.

심지어 야쿠자 같은 조직 폭력배들까지 주식 시장에 개입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의 삶은 매일이 축제였습니다. 고급 스포츠였던 골프 회원권이 4배나 뛰고, 명품 브랜드 고객의 70%가 일본인이었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광란적인 소비 행태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이 광란의 시대는 1989년 12월 정점을 찍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투자자들이 ‘이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매도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주가는 곤두박질쳤습니다.

일본 중앙은행은 뒤늦게 버블임을 인지하고 금리를 6%까지 인상하고 대출 규제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늦은 조치였습니다. 높아진 이자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산을 매각하기 시작했고, 쏟아져 나오는 매물에 부동산 가격은 폭락했습니다.

부동산과 주식을 팔아도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부실 채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결국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42개의 금융기관이 도산하며 일본 경제 재앙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투자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단기적인 수익에 눈이 멀어 미래 가치에 대한 고민 없이 자산 가격 상승만을 쫓는 투자는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자 레이 달리오(Ray Dalio)가 제시한 ‘경제 작동 원리’에 따르면, 신용은 경제 성장의 중요한 동력이지만, 통제되지 않는 신용 확대는 결국 버블과 붕괴를 초래합니다.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Bridgewater Associates)의 보고서를 통해 이러한 원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아베노믹스 정책

일본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본은 끝없는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1995년 1월, 일본 4대 무역항 중 하나인 고베에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규모 7.3의 지진은 고베항의 항만 시설 대부분을 파괴했고, 수많은 인명 피해와 기업 도산을 야기했습니다.

이 지진으로 인한 복구 자금 유입은 일시적인 엔고 현상을 초래하여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일본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을 더욱 약화시켰습니다.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를 거의 제로 수준까지 낮췄지만, 이미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던 기업과 가계는 더 이상 돈을 빌려 투자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벌어들인 돈은 빚을 갚는 데 급급했고, 기술 투자나 설비 증설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일본 대표 증권사 야마이치 증권이 폐업하는 등 일본 경제 재앙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98년 한 해에만 19,171개 회사가 도산했고, 개인 파산 건수는 전후 최초로 10만 건을 돌파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사회 분위기는 침울했습니다.

물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시대가 도래했고, 기업의 경쟁력은 떨어졌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회복하려던 일본 경제에 또 다른 치명타를 안겼습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국가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를 우리는 흔히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은 이 디플레이션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구조 개혁과 일본은행의 양적 완화 정책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2년 아베 신조 총리가 내세운 ‘아베노믹스 정책‘이었습니다. 아베 총리는 무제한 양적 완화, 재정 확대, 구조 개혁의 ‘세 개의 화살’을 통해 디플레이션을 잡고 경제를 되살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 시절보다 훨씬 강력한 양적 완화였고, 엔화 가치 하락을 유도하여 일본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아베노믹스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며 취업률 개선, 기업 영업이익 증가, 인플레이션 발생 등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는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이로 인해 소비 위축과 저성장이 고착화되었습니다.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본은 많은 것을 놓쳤고, 이를 통해 고용 안정, 임금 인상, 출산율 제고 등 근본적인 사회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일본이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냉전 시대의 전쟁 특수 수혜와 미국으로부터 반도체 기술 이전을 허용받았던 행운적인 요소가 있었을지라도, 그런 행운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특별한 기술을 갈고닦아 판매한 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버블의 시작을 여러 시각으로 그 요인을 바라볼 수 있겠지만, 일본인들의 자만심과 욕망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일본 기업들이 저금리를 활용해 부동산, 주식 투기가 아닌 기술에 더 투자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적어도 잃어버린 30년은 맞이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레이 달리오가 말한 것처럼 신용은 경제와 떼놓을 수 없고 그 순기능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개인과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이 미래 가치가 없다면 결과는 하락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일본 버블 경제 붕괴 속에서 돈을 잃고 기업이 도산했겠지만, 그 안에서도 욕망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객관적인 지표로 시장을 분석한 사람은 부를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어떤 식으로 투자를 해야 할지 철학을 정립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이런 시간은 저와 여러분의 투자 안목과 철학을 확립해 줄 중요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같이 보면 좋은 시리즈]

-레이 달리오 경제 작동 원리